생각

주술을 깬 불교, 주술에 사로잡히다

mukdawn 2026. 5. 24. 11:26
(2021.05.11 아카이브)
 
불교에 정통하신 페친들이 여럿 계셔서 잘못된 이해이거나 뻔한 소리일까봐 염려되긴 하는데 여하튼.
몇 번인가 썼지만 이야기를 통해 프레임을 짜는 것이 주술magic이다. 즉 주술呪術이란 주술主述이며 따라서 말로써 만들어진 것spellcraft이다. 왜냐하면 이야기에는 반드시 관점과 행위의 주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 자체, 나아가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에 내재한 것이며 결국 이야기가 산출하는 결과물은 이야기의 주인공-“나”라는 감각이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무슨 자유로운 근대적 개인(그런 것이 이름 말고 현상으로 존재한 적 있는지는 둘째치고)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일요일에 교회 안가면 지옥에 떨어진다든지, 대학가면 여자친구 생긴다든지 하는 온갖 주술의 프레임들이 얼기설기 얽매여 덩어리진 것이다. 자아라는 것은 결국 주문(언어)으로 만들어진 영체靈體로 또다른 주술을 만들고 전달하는 매질이 된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사실상 주술의 일반원리에 대한 탐구인데 실제로 융이 연금술을 비롯한 여러 주술전통으로부터 도출한 것은 대립쌍들의 내적 통합을 통한 자기self 실현론이다. 태생적으로 생애주기별 성장과업과 사회적 역할론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순응주의인데 실제 주술의 근본목적 또한 이것이다. 조던 피터슨같은 소박한 보수주의자가 학문적 유통기한이 다 된 융을 동원하는 것도 이렇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여하간 이 프레임들의 일시적이요 가상적인 본질을 깨닫고 끊어버리려는 시도가 불교라고 생각하는데, 천신과 마왕들을 조복시켰다는 것이야말로 이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마구니적인(...) 흥미를 가지고 있는 두 분야가 바로 선불교와 밀교이다. 왜냐하면 온갖 주술을 끊어내고자 하는 불교의 시도 가운데 명백히 주술로의 회귀이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려는 시도가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이중구조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밀교의 주술성이야 익히 알려진 대로이다. 반면 선불교는 주술을 피하기 위해 언어를 초월하고자 하지만 결국 그를 통해 산출되는 것이 윤리를 포함한 나머지 세계 전부를 상대화하면서 감성으로 추동되는 “나(깨달음)”의 절대화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무아를 표방하고 있더라도 현상적으로는 결국 그렇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다. 백 개 걸려 있던 주술을 한 개 주술로 통합한다고 해서 그것이 깨우침인지...아마도 그래서 자유와 개인을 숭상하는 서구사회에 zen이 강력한 소구력을 보였던 것 아닐까? 더구나 이 “깨달음”은 공감되는 것이지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자의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싶은 그런 느낌.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학계에서 선불교와 밀교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이슈가 되고 있다는 정보는 나로선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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