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의 형태

mukdawn 2026. 5. 24. 11:19
(2024.01.02 아카이브)
 
인파로 붐비는 퇴근길, 경의중앙선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는 디지털미디어시티역 2-4플랫폼에서.
어느 웹소설 남자 주인공으로 보이는 등신대 패널을 힘겹게 끌어안고 열차를 타는 젊은 여성을 보았다. 미묘하게 찌그러지고 접착제 흔적이 남은 뒷판이 필시 파장한 행사에서 염치불구 양해를 구하고 받아온 것이겠거니.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오버센스인 복장도 그녀가 현실보다는 픽션 속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일코에 노력해온 동인녀라는 사실을 일층 드러냈다. 내 앞에 선 아저씨는 눈치도 없이 검은 창에 비친 거대한 등신대 윤곽에 화들짝 놀라 획 뒤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다만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패널이 구겨질까 하는 걱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원 전철 가운데 남친 대신 남캐의 품에 얼굴을 묻고 가는 그녀의 모습에는 어떤 감동이 있었다. 아 이것이 더 이상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의 형태구나. 필시 그녀는 트위터에서 사납게 한남(의 소식들)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런 것은 내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닳아 없어질 미래 대신 영겁의 현재를 택했으니까.
이내 내릴 역에 도착한 나는 최대한 패널에 닿지 않도록 온 몸을 구기며 그녀 옆을 비켜 나갔다. 적어도 이 열차에는 당신의 진심이 가진 무게를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은 있었습니다. 말 없는 응원을 건네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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